상상을 해보자. 어느 날 살던 곳에서 쫓겨나 화물 기차에 마치 만원 지하철처럼 실려서 몇 날 며칠을 음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마실 물도 부족한 채로 생전 가본 적이 없는 외딴곳으로 간다고. 그곳에 내리자 총과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나에게 알 수 없는 언어로 고함치면서 명령을 한다. 사람들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가족들과는 떨어지게 되고, 가족들은 어디론가 열을 지어 가버렸다.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몇 명뿐인데, 그들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나의 모든 소지품은 뺏겼다. 사람들을 따라 한 실내로 들어갔다. 옷을 모두 벗으라고 한다. 그리고 샤워실로 들어가 짧은 샤워 후에 강제로 삭발을 당했다. 그 후 얇은 천의 줄무늬 옷을 받았는데, 이 옷이 나에겐 너무 커서 바지가 흘러 내린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받았다. 이 나막신은 왼발과 오른발의 크기가 달랐고, 하나는 나에게 작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컸다. 바지 품을 부여잡고 절룩거리며 다음 방으로 가니 팔에 문신으로 숫자를 새겨 넣었다. 그 숫자가 이제 나의 이름이 되었다. 가족을 기억할 사진 한 장도, 나의 머리카락도, 나의 몸에 맞는 옷,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걸음걸이, 이름도 다 빼앗겼다.

그리고는 수용소의 한 막사에 가게 되었는데, 짚으로 대강 채워진 매트리스에 두 사람이 누워 자야만 했다. 소지품이 없으니 사물함도 없다. 베개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길고 긴 점호를 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무거운 것을 들고 옮기는 작업을 하는데 조금이라도 쉬려고 요령을 피우면 매를 맞는다. 하루에 두 번 나오는 식사는 매일 똑같은 주먹만 한 거친 빵과 양배추나 무, 감자 조각이 약간 들어있는 묽은 스프다. 노동 강도는 심한데 식사는 빈약하니 늘 허기지다. 심지어는 꾸는 꿈도 언제나 먹는 꿈이다. 수용소 마당에 풀이 아주 조금이라도 솟아나면 사람들이 그걸 뜯어 먹는다. 그래서 늘 수용소는 흙바닥인데 습기까지 찬다. 그러면 나무로 된 신발에 진흙이 달라붙어서 걸을 때마다 발에 아령이 붙은 느낌이다. 나보다 이전에 수용된 사람들을 보면, 장기와 뼈 그리고 그 위를 덮은 피부 덩어리로밖에 안 보인다. 이곳의 생활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질문을 해보아도 답을 해주지 않고, 누군가 답을 해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씻을 힘은 사라졌고, 몸은 계속 수척해진다. 수용소 한 켠에는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가스실과 시신을 불태우는 화장장이 있고, 화장장의 굴뚝에선 거의 매일 연기가 피어난다. 발과 진흙과 나막신이 부대껴 생긴 발의 염증과 부종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 서너 달에 한 번 있는 선발에서는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가스실로 갈지 조금 더 목숨을 영위할 수 있을지 결정된다. 이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생존한다면 무엇이 생존하도록 한 것인가, 이곳에서 ‘인간다움’은 실현될 수 있을까? 또 어떤 인간다움이 이 공간을 만들었는가?

이 책은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저자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이야기를 담은 증언록이다. 레비는 자신의 증언록의 제목을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의문문의 형태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지칭하는 것은 쉽게 생각하면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다면, ‘이것’을 그와 같은 상태로 만든 이들, 즉 나치와 나치에 협력한 자들도 인간인지를 묻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강제 수용소의 상황은 자연재난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면서, 전쟁의 부수적인 현상도 아니었다. 이 강제 수용소의 체계는 나치의 합리적인 계산 속, 즉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착취하고 죽이는 효율적인 방법에 대한 계산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한계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는 사람들은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2년여에 이르기까지 수용소의 환경에서 생존하다가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스실에서 죽었다. 사방이 철조망으로 막힌 공간 속에 동시 수용되는 인원도 최대 9만 명에 이르렀었다. 이들은 거의 모든 유럽지역의 각 지방에서 분류되고 이송된 사람들이었다. 수용소 내부에서 쓰는 언어는 2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수용소는 너무나 다른 언어가 쓰인 탓에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게다가 의식주 결핍의 공간, 폭력의 공간이었다. 이 한계상황은 특별한 종류의 인간상을 만들어낸다. 이 책에서는 레비의 증언을 통해 그 인간상을 볼 수 있다. 생존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사람들은 물론, 그런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하던 사람이 거의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종류의 인간에 대한 묘사가 있다. 하지만 이 두 종류의 사람 모두 인류가 공유해온 ‘인간다움’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첫 번째, 생존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수용자들은 대체로 수용소가 아니라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했을 사람들이다. 타인들을 최대한 착취하고 폭력을 서슴없이 사용하며, 도둑질을 하고 기만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흔히 중범죄자들에게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수용소의 공간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만이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공간이다. 즉 인간이 안 될 때에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대부분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필연적으로 도달했던 인간상이 있다. 이것을 인간이라도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수감자들도 그들을 사람으로, 이름으로 부르기 힘들었기 때문인지 그들을 ‘무젤만’(Muselmann, 이 책에서는 ‘무슬림’으로 번역했으나,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수용소에서 쓰이던 고유한 은어로써 학계에서는 ’무젤만’이라는 독일어 발음 그대로의 표현을 쓴다)으로 불렀다. 무젤만은 무슬림, 즉 이슬람 신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은 서로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을 무젤만으로 부른 데에는 특별한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걸로 해석된다. 프리모 레비를 비롯해서 강제 수용소 증언자인 장 아메리(Jean Amery)와 라울 힐베르크(Raul Hilberg)에 따르면, 이들이 영양이 너무나 부족한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몸을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무슬림들이 꾸란을 외우기 위해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거리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무젤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비는 그가 죽기 전, 수용소의 기억을 고찰한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다시금 무젤만을 회상하는데, 그때 레비는 무젤만을 ‘고르곤을 본 자들’이라고 부른다. ‘고르곤’은 메두사를 부르는 다른 말이다. 신화 속에서 인간이 고르곤을 보면 온몸이 굳어져 돌로 변하게 된다. 고르곤을 본 사람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인간적 행위를 하거나 인간으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무젤만은 말하자면 수용소의 조건이 만들어 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품위, 인간적인 것, 존엄성이 전부 탈취되고 전락당한 상태의 존재다. 이름이 없고, 이름 주기를 인정하지 않아서 지시할 수도 없는 존재다. 오로지 육체의 기능, 기계적인 움직임만 남은 상태다. 레비를 비롯한 많은 증언가들은 이들의 존재를 언급하지만 그렇다고 상세하게 말하길 꺼린다. 내가,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존재이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찰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이성, 도구의 사용, 불의 사용, 분절 언어의 사용 등이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고찰들 속에는 ‘신체 건강한 성인’ 인간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인간의 본질 찾기 이론은 대체로 태어나고, 성장하며, 다양한 장애도 존재하는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포괄하지 못한다. 더욱이 ‘무젤만’을 포괄하지 못한다. ‘무젤만’은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 및 정신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인간다움은 오직 특정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고, 그 상황을 구성하는 낱낱의 요소들을 찾아서 그것이 그 누구에게도 결핍되도록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타인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도록 애쓰는 인간다움이 인류에게 필요한 인간다움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나치는 왜 이런 수용소를 만들었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강제 수용소의 설립과 유지, 학살은 나치와 독일 시민들, 그리고 수용소 근방의 폴란드 시민들, 많은 기업가들, 공무원들, 나치에 협력한 모든 유럽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에 (무반성적으로) 충실하다 보니 귀결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행위들의 이면에 있었던 생각 중 하나는 유대인은 다른 모든 인간과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반유대주의의 사고였다. 유럽 전역에 걸쳐서 반유대주의의 생각이 강했지만, 실재하는 유대인들은 다른 유럽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유대인들은 유럽인과 평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타당성을 지니려면, 그 이미지에 맞는 실재하는 유대인이 있어야 한다. 마치 내 손에 딱 맞는 탁구 그립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재에 구현해 내듯이, 이미지가 먼저 있고, 실재하는 유대인들을 비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는 ‘이것 봐라. 이런 존재가 어떻게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이에 대한 레비의 증언을 보자.

“사실 민간인에게 우리는 불가촉천민이다. 민간인들은 대체로 노골적으로, 경멸과 동정이 섞인 뉘앙스로, 이와 같은 삶을 선고받고, 이런 상황으로 떨어진 걸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죄를 지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고 그저 동물의 소리처럼 그로테스크하게 들리는 우리의 다양한 언어를 듣는다. 머리카락도 없이, 이름도 없이, 체면도 없이 노예처럼 비천하게 일하고, 매일 얻어맞고, 매일 굴욕을 당하는 우리를 본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눈에 담긴 반항이나 평온 혹은 믿음의 빛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를 진흙투성이의 누더기를 입은 굶주린 도둑으로, 사기꾼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뒤섞어 우리가 이런 굴욕을 당해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한다. 그들 중 우리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에게 우리는 ‘카체트’, 중성 단수 명사일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 구절을 거듭 상기해야 한다. 혹자는 난민들이 더러워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한다. 혹자는 난민들을 구성하는 민족들이 범죄를 자주 저질러서 난민들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또 어떤 선생은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학생이 좋은 성적을 내지 않아서 좋은 학생이라고 보지 않는다. 현재 보이는 부분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만큼 손쉬운 것이 어디있을까. 어떤 사람이 지금의 처지에 있게 된 원인들, 서사들, 역사를 아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이 우리를 나치와 나치에 협력했던,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비해 인간다움은 유지했을지는 모르지만, 사고하기를 중지한 사람들과 구분시켜주는 것일테다. 안타까운 것은 나치가 자행한 비인간화의 과정을 현재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들에게 수십 년에 걸쳐 차근차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인간이 행한 최악의 반인륜적 행태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기고 ㅣ 장지해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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