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광장』 : 진정한 ‘밀실’과 ‘광장’이 존재할 수 있을까?

노래를 한 곡 듣고 시작해 보자 . 노래를 들을 수 없다면, 가사를 음미해 보자.

Al Stewart – The Palace Of Versailles (1978)

The wands of smoke are rising
From the walls of the Bastille
And through the streets of Paris
Runs a sense of the unreal
The Kings have all departed
Their servants are nowhere
We burned out all their mansions
In the name of Robespierre
And still we wait
To see the day begin
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Inside the midnight councils
The lamps are burning low
On you sit and talk all through the night
But there’s just no place to go
And Bonaparte is coming
With his army from the South
Marat your days are numbered
And we live hand to mouth
While we wait
To see the day begin
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The ghost of revolution
Still prowls the Paris streets
Down all the restless centuries
It wonders incomplete
It speaks inside the cheap red wine
Of cafe summer nights
Its red and amber voices
Call the cars at traffic lightsWhy do you wait
To see the day begin
Y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연기 기둥이 올라오고 있네 바스티유 감옥 벽에서파리의 거리 여기저기에는 뭔가 현실이 아닌 듯한 기운이 감도네 왕가는 이미 떠나 버렸고그들의 하인들은 어디에도 없네 우리는 모든 저택들을 불태워 버렸네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기다리네 그날이 시작되기를 보기 위해 우리의 시간은 바람 속에서 헛되어가네 궁금하네, 왜 그럴까궁금하네, 왜 그럴까, 베르사유 궁전 전체에서 외롭게 메아리 치네   한밤중에 열린 의회에서 등불은 약해지고 있네당신들은 밤새 앉아 이야기하고 있지 그러나 갈 곳이 없네 그리고 보나 파르트가 오고 있지 남쪽에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마라, 당신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우리는 하루살이 삶을 사고 있지그 날이 시작되기를 보기 위해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지 우리의 시간은 바람 속에서 헛되어 버렸지 궁금하네, 왜 그럴까,궁금하네, 왜 그럴까, 베르사유 궁전 전체에서 외롭게 메아리 치네   혁명의 유령은 여전히 파리 거리를 어슬렁거리지 수백 년이 흘러도 잠들지 못한 채 로그 유령은 [혁명의] 미완을 궁금해 하지 여름날 카페에서 싸구려 레드 와인 속에서 혁명의 유령은 말하지[와인에 취한] 목소리들은신호등에 멈춘 차들을 부르지 그 날이 시작하기를 당신은 왜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당신의 시간은 바람 속에서 헛되어 가고 있어궁금하네, 왜 그럴까,궁금하네, 왜 그럴까, 베르사유 궁전 전체에서 외롭게 메아리 치네 궁금하네, 왜 그럴까, 베르사유 궁전 전체에서 외롭게 메아리 치네


앨 스튜어트(Al Stewart)의 이 곡은 <The Palace of Versailles>라는 곡이다. 한국인들이 잘 아는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의 원곡이 바로 이 곡이다. 이 곡이 <사랑한 후에>의 원곡이지만, 이 곡 역시 William Byrd의 <The Earl of Salisbury>를 모티브로 하여 만든 곡이다. 원곡 탐구는 유튜브에서 들으며 하기를 바란다.

이 곡의 가사 중 쓸쓸함과 안타까움을 주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혁명의 유령이 파리 시내를 배회한다는 것이다. 혁명은 완수되지 못했다, 나폴레옹으로 인해. 혁명의 광장은 이제 카페들의 거리로 바뀌었고, 혁명은 과거의 기억으로나 남은 곳이 되었다. 광장은 이제 술취한 범부들의 외침으로 가득 찬 곳이다. 혁명의 유령은 술기운과 함께 살아난다.

우리에게도 광장의 기억이 있다. 현 시대의 사람들에게 ‘광장’의 기억은 아마도 2016년 초겨울 시작된 촛불시위의 광장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 현 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의 부모 세대에게 ‘광장’은 1987년 6월 항쟁의 장(場)이었을 것이다. 그 부모 세대의 부모 세대들에겐 4∙19가 ‘광장’의 기억일 것이다. 오랜 기억들도, 오래지 않은 기억들도 이제는 광장의 유령들로 존재하여 배회하고 있다, ‘그 날’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혁명의 유령처럼.



‘광장’의 기억이 우리에게 집회와 시위, 그리고 혁명과 같은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진정한 광장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공의 것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광장은 공공의 것을 사취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장(場)으로 존재해야 했다. 그래서 진정한 광장은 존재하지 않았고, 소설가 최인훈이 『광장(廣場)』에서 주인공 이명준의 자살을 통해 진정한 광장이 유토피아(utopia)임을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한다.

남한에 살고 있던 이명준은 월북을 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고위 인사가 되어 있어 반공 시국에 인신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인신의 위협보다도 자신이 꿈꾸는 광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에르케고르 선생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었다.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 다만 좋은 데가 있다면, 그곳에는,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정말 그곳은 자유 마을이었다. 오늘날 코뮤니즘이 인기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한 마디로 가리킬 수 있는 투쟁의 상대―적을 인민에게 가리켜줄 수 없게 된 탓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때에는 그렇게 뚜렷하던 인민의 적이 오늘날에는, 원자 탐지기의 바늘도 갈팡질팡할 만큼 아리송한기만 하다. 가난과 악의 왕초들을 찾기 위하여, 나누어지고 얽히고설킨 사회 조직의 미궁 속을 헤매다가, 불쌍한 인민은, 그만 팽개쳐버리고, 예대로의 팔자풀이집, 동양 철학관으로 달려가서, 한 해 토정비결을 사고 만다. 일류 학자의 분석력과 직관을 가지고서도, 현대 사회의, 탈을 쓴 부패 조직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드는 판에, 김서방 이주사를 나무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하다. 그래서 자유가 있다. 북녘에는, 이 자유가 없었다. 게으를 수 있는 자유까지도 없었다. 그건 제 멋 짓밟기다. 남한의 정치가들은 천재적이었다. 들어찬 술집마다 들어차서, 울랴고 내가 왔던가 웃으랴고 왔던가를 가슴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대중을 위하여, 더 많은 양조장차릴 허가를 내준다. 갈보장사를 못 하게 하는 법률을 만들라는 여성 단체의 부르짖음은 그날치 신문 기사거리를 만들어주는 게 고작이다. 그들의 정치 철학은 의뭉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데로 풀리는 힘을 막으면, 물줄기가 어디로 터져나올지를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에겐, 진심으로, 교회에 나가기를 권유하고, 외국에 보내서 좋은 가르침을 받게 하고 싶어 한다.” (pp. 151~152)

그렇다. 남한은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일 뿐이다. 누구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서 의견과 의지를 개진할 장(場)이 없다. 아니, 그런 의견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다. 정치인들의 대중 조작술 덕분에 어느 개별 시민도 정치적 주체로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숫제 믿음조차 없’다. 어떤 개인들도 자신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향유도, 아니 인식조차도 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사적 자유(private liberty), 벵자멩 꽁쓰땅(Benjamin Constant)이 말하는 ‘근대인의 자유’밖에 없다. 최인훈 어법으로 말하자면 사적 공간인 밀실(密室)밖에 없다.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이 밀실조차도 최인훈에겐 진정한 밀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명준이 비판하는 남한의 자유는 사적 자유나 근대인의 자유가 의미하는 경제적 자유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자유가 아니다. 최인훈에겐 남한에 존재하는 자유는 타락할 자유이다. 기껏해야 술에 취하고 갈보집을 찾을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최인훈의 눈엔 남한 사회의 이러한 기만적 자유는 정치술의 결과이다. 정치가들이 자신들만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대중들은 정치에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1980년대의 3S 정책(sports, screen, sex)과 같은 술책을 쓴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김서방’이나 ‘이주사’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들은 대중 조작의 기제에서 꼭두각시일 뿐이다. 그들을 나무라는 것은 마치 김수영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야경꾼을 탓하는 것과도 같다.



밀실밖에 없는, 그것도 진정한 밀실이라 할 수 없는 밀실밖에 없는 남한 사회는 이명준이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그는 함께 어우러지는 광장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몰래 월북한다. 그러나 북한은 또 어떤가? 그는 자아비판을 ‘당한다’.

사원들이 돌아가고 난 널찍한 편집실에는, 명준까지 쳐서 다섯 사람이 남아 있었다. 편집장은 그대로 앉고, 다른 사람들은 좌우로 두 사람씩, 편집장 책상 바로 앞 책상으로 다가앉았다. 편집장이 일어서서 말을 꺼냈다.

“자아 비판을 할, 이명준 동무에 대한 보고를 하겠습니다. 이명준 동무는, 평소에 개인주의적이며 소부르조아적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당과 정부가 요구하는 바 과업 달성에 있어서 과오를 범했습니다. 동북 중국에 있는 ‘조선인 꼴호즈’의 생활을 현지 보도함에 있어서 이명준 동무는, 그 소부르조아적인 판단의 낙후성으로 말미암아, 현지 동포들의 영웅적인 증산 투쟁의 모습을 여실히 파악하는 데 실패했으며, 주관적 판단을 기초로 한 그릇된 보고를 보내왔습니다.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말하기를 ‘사회 제도는 일조일석에 변할지라도 인간의 이데올로기는 일조일석에 변하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이명준 동무는, 그가 남조선 괴뢰 정부 밑에서 썩어빠진 부르조아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의 반동적인 생활 감정에서 자신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명준 동무가 그와 같은 반동적 사고 방식을 마치 정당한 것이기나 한 것처럼 반성하려 하지 않는 것은, 후보 당원으로서 당과 정부에 대한 충성심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전체 인민에 대한 중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과 정부 및 전체 인민의 이름으로, 냉정한 자아 비판을 요구합니다. 다음에 이명준 동무의 기사 내용 가운데서, 과오를 범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는 현지 꼴호즈의 생활을 보고하는 가운데 ‘……그들의 어떤 사람이 입고 있는 의류를 보았을 때 기자는 문득 놀랐다. 그것은 일제 군대의 군복에서 견장만 뗀 것이었다. 운운’ ‘신발은 지까다비가 제일 많았다. 운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 물질적인 향상을 가져오려면 더 많은 땀과 시간이 필요하다는……운운’하는 대목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중대한 과오입니다. 다음에 이명준 동무의 자아 비판이 있겠습니다.” (pp. 112~113)

이 대목을 보면 조지 오웰의 『1984』가 떠오르지 않는가? 사실을 사실로 기술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이 조작(manipulation)되어야 한다. 물론 그들은 조작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조작과 기만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진정으로 생각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데올로기적인 무장을 하고 있는 저 편집장의 말은 사실 아이러니 한다. 물질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생각과는 정반대로 의식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깨어난다면, 놀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어찌도 이렇게 왜곡할 수 있냐고!

이명준에게 저 자아비판은 충격적이었다. 이 경험은 이명준이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북으로 가는 선택을 가로막는다.

“스탈리니즘에 있어서의 마틴 루터는, 아직 없다. 크렘린의 서슬에 맞선 사람은, 이단 신문소에서 화형이 되었다. 권위는 아직도 튼튼하다. 하느님이 다시 온다는 말이 2,000년 동안 미루어져 온 것처럼, 공산 낙원의 재현은 30년 동안 미루어져왔다. 여기까지가 그가 알아볼 수 있었던 벼랑 끝이었다. 벼랑을 뛰어넘거나 타고 내리지도 못했을뿐더러, 이 무서운 밀림에 과연 얼마나 한 자리를 낼 수 있을지, 자기 힘에 대한, 지적 체력에 대한 믿음이 자꾸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물음을 누군가와 힘을 모아 풀어나간다는 삶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벌써 전쟁이 나기 전에 알고 있던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참을 차비가 되어 있었다. 역사의 속셈을 푸는 마술 주문을 단박 찾아내지 못한다고 삶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참고, 조금씩, 그러나 제 머리로 한 치씩이라도 길을 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북조선 같은 데서, 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의 처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이명준은 자기한테 돌아온 운명을 한탄했다. 적어도 남만큼한 충성심을 인정받으면서, 자기가 믿는 바대로 남은 세월을 조용히, 그러나 자기 힘이 미치는 너비에서 옳게 써나간다는 삶조차도 꾸리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제국주의자들의 균을 묻혀가지고 온 자로서, 일이 있을 적마다 끌려나와 참회해야 할 것이었다. 마치 동네 안에 살면서도 사람은 아닌 문둥이처럼. 그런 처지에서 무슨 일을 해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돌아갈 수 없는 정말 까닭이었다.”

그는 돌아갈 수 없었다. 선전 구호만을 외쳐하는 광장, 자아 비판의 장(場)이기만 한 광장, 이런 광장만 있는 곳이라면 갈 수가 없다. 제국주의의 균을 묻혀 온 오염된 자로서 낙인 찍혀야 한다. 이는 한 개인으로서 평생 살아갈 용기를 꺾는 것이다. 개인으로서 입을 피해, 개인으로서 당하게 될 권리 침해는 광장이 아닌 자유의 공간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북으로 갈 수 없는 이유가 이러한 개인적 핍박 이외에 또 있다. 북한은 진정한 ‘광장’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남한 사회에는 사적 자유의 공간인 밀실이 있지만, 타락할 자유의 밀실일 뿐이어서 진정한 밀실이라 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에는 공적 자유의 공간인 광장이 있지만, 이 광장은 당을 찬양하는 광장이지 진정한 정치적 담론을 하는 공론장, 즉 진정한 광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핍박과 더불어 광장의 부재는 이명준이 북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명준은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다. 중립국은 현실 세계이다. 무리가 발을 딛고 있는 감각의 세계이고, 물질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가 남에서 북으로, 다시 중립국으로 가는 그의 인생 여정은 이상을 찾는 여정이었다. 여기에서 그의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상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 세계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ideal)’의 어원은 ‘관념(idea)’이다. 관념은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의 물질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 세계인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그 이상(ideal)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상’은 개념적으로 ‘유토피아(utopia)’일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utopia)’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뜻한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그의 책 『유토피아』(Utopia)의 제목으로 삼은, 그가 만든 ‘utopia’라는 단어는 희랍어 “not”을 의미하는 “ou”와 “place”를 뜻하는 “topos”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유토피아’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이다. 여기에 더해 ‘이상적인 유토피아’라고 말한다면, 여기에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가 두 번이나 강조되어 들어간 것이다. 이명준이 꿈꾼 이상 사회, 진정한 광장이 존재하는 세계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진정한 밀실의 세계도 없다. 광장을 차지한 정치인들의 기만적 기제가 만들어낸 밀실에서 꼭두각시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지만, 실존이 불가능한 마당에 본질에 앞서 무엇하랴. 『광장』의 서문들을 읽어 보길 바란다.


이명순
다원교육입시연구소 부소장
EBS 교양특강 논술&철학 강의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사/석사
개논비연구소 대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