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괴로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한 부류는 반복을 좋아하고 한 부류는 반복을 싫어한다. 반복은 예측 가능성을 높여 불확실성을 줄여주며 삶의 안정성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반복을 좋아하는 부류는 불확실성보다 확실성을 선호하고 불안보다 안정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반면 반복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약화시켜 인간의 가치를 훼손한다. 이런 점에 근거하면 반복을 싫어하는 이들은 불확실하거나 불안하더라도 창의적이며 새로운 것에 도전적인 존재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반복을 싫어하는 부류다. 싫어하는 것을 지나쳐서 거부한다. ‘필경사’인 그는 하루 종일 문서 베끼는 일을 반복하는데, 오늘날로 치면 복사기가 하는 일과 유사하다. 어디에도 사유와 창의와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기계적이다. 1853년 이 세계에 등장한 바틀비의 나이는 올해로 169세다. 현재의 평균 수명으로 보면 그는 이미 이 세계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세계 안에 있고 살아있다. 살아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왜 당신은 반복의 사이클에서 나오지 못하는가?


자본주의는 합리성을 표방한다. 합리성은 이익을 선호하고 손실을 꺼리는 것을 이른다. 이익을 증진시키는 방법으로 노동생산성을 제시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다. 그에 따르면 분업은 생산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이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그는 어떻게 하면 국가의 부 (국민의 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를 증진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였고 그 방법으로 분업을 제안했다. 국부의 원천을 노동생산성에서 찾았던 그는 노동생산성을 높여 물자를 풍부하게 생산하면 모두에게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노동생산성은 분업에 의해 향상된다고 보았다. 분업은 노동자 개개인의 숙련도를 높일 수 있고, 작업 전환 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반복을 통해 작업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이를 통해 국부는 증진되고 사회는 발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는 분업의 장점만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분업의 역설’에도 주목하였다. 분업의 최대 문제는 인간 본성의 고귀함을 상실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공교육을 강조하였고 국가가 교육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예견한 분업의 대표적 문제점은 첫째,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거나 창조력을 발휘할 기회를 상실할 수 있다. 둘째, 인간이 창의성을 상실하여 인간으로서 가장 둔하고 무지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셋째, 판에 박힌 똑 같은 일상의 반복이 마음의 용기, 불확실성, 모험 등을 질색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넷째, 길들여진 직업(일) 외에 신체활동도 등한시하게 되며, 인내, 활력 등에도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분업시스템을 체계화하여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체계를 일상화 하였다. 자동차 회사 포드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이르는 포디즘과 사회학자 조지 리처가 주장한 맥도날드화 같은 것이 대표적인 분업시스템이다.


자본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1760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그 출발이라고 보는데 이견이 없을 뿐이다.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 시스템을 만들어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것만으로 산업 혁명은 인류에게 자본주의의 매력을 실감케 했다. 신분이 세습되던 절대왕정과 봉건사회의 개인들은 소유에 대한 자유가 없었다. 그들은 노예이거나 소작인이었다. 그러므로 노력한 만큼 그리고 능력만큼 얼마든 소유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설령 일정 부분 낭설이고 허구라 할지라도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은 노동의 목적과 목표를 재설정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노예상태의 피동적 생존을 넘어 소유에 대한 강한 열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류의 삶을 진일보시키는데 기여하였지만, 그 이면에서 노동자들은 분업과 반복 노동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반복 노동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극화한 것이다.

바틀비는 애덤 스미스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물일지 모른다. 영국 산업혁명의 시작이 1760년이고 <국부론>이 출간된 것은 1776년이니 <국부론>은 산업혁명의 영향 하에서 저술된 것이라고 봐야한다. 따라서 노동생산성을 통해 국부를 증진하자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당시 영국 산업혁명기의 물질적 풍요와 무관하지 않다. 물질적 풍요는 노동자들의 분업을 기반으로 얻어진 결과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일상화된다는 것은 경제적 부의 증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삶이 극단적으로 단순 반복적이 된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작가 허먼 멜빌은 그 단순 반복의 전형적 피해자로 바틀비를 창조한 것이다.

산업 혁명으로부터 90년, <국부론>으로부터 80년 쯤 후인 1853년 <필경사 바틀비>가 세상에 나왔다. 1853년이면 자본주의가 시작된 지 근 1세기정도 지난 뒤다. 자본주의의 과실만이 아니라 그림자도 드러난 시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분업이 인간의 창의성을 비롯한 인간본성을 위협할 것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경고를 소설이 그대로 극화한 것이 아닌가 합리적 추측이 가능하다. 따라서 바틀비는 애덤 스미스의 경고를 귓등으로 흘려버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풍요에 대한 기대가 지나쳐서 그랬든 아니면 물질적 풍요가 인간의 본성보다 더 매력적이고 가치 있다고 여겼든, 19세기 인류는 물질적 풍요를 얻는 대신 인간본성을 내어주었다. 21세기 인류 또한 19세기 인류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21세기 인류라고 해서 더 고귀해졌을 리 없고, 그때나 지금이나 마치 젊음에 대한 욕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내준 파우스트박사의 삶을 반복하고 있으니까. 말하자면 <필경사 바틀비>는 자본주의 과실이자 쓰디쓴‘뒷맛’이다. 풍요를 얻고자 내어준 우리들의 영혼이다.

분업의 역설을 예견했던 애덤 스미스는 공교육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지키길 바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공교육은 자본주의에 적합한 인간형을 만들어내는데 여념이 없다. 창의성이며 모험이며 지적 도전을 멀리하고 기존의 지식만 답습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을 강화하기보다 대다수의 인간을 食道esophagus나 닦는 일에 골몰하게 하고 가치와 존재론적 논의는 뒷전으로 밀어내버렸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연봉 서열화에 동참하고 있으며 충실한 소비자 아니면 기계적 노동자가 되어 급격히 속물화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18세기에 이미 예견한 인간 본성의 상실과 존재론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자, 이제 문제적 인간‘바틀비’의 삶을 들여다보자.

필경사인 바틀비는 하루 종일 문서 베껴 쓰는 단순 반복적인 일을 한다. 고용주인 변호사는 늘어나는 업무를 감당할 수 없어 바틀비를 고용했다. 처음 한동안 바틀비는 필경사 업무에 잘 적응하였고 특별히 모날 데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양의 업무를 훌륭히 처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성실하며 유능한 베테랑이었다. 그가 근무하는 변호사 사무실은 창문이 있긴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단조로운 하얀 벽면뿐이거나 검게 치솟은 벽돌뿐이다. 빛조차 거의 들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과 기계적인 업무의 반복은 바틀비에게 최소한의 창의성마저 앗아간다. 그런 어느 날부터 바틀비는 점차 변호사가 맡기는 업무를 하나씩 거절하더니, 나중에는 모든 일을 거절한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이런 말만 할 뿐이다.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

그러나 선량한 변호사는 바틀비를 내치지 못한다. 오히려 바틀비의 언행을 이해하려 노력하기까지 한다. 그런 고용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틀비는 출퇴근 없이 아예 변호사 사무실에서 산다. 사무실에 살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노동을 거부한다. 속앓이만 하던 고용주인 변호사는 그를 내쫓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사무실을 이전해버린다. 바틀비를 사무실에 그대로 남겨둔 채 말이다. 사무실을 이전한 변호사는 바틀비를 잊고 일에 전념한다. 그런 어느 날 이전 사무실의 새 주인이 찾아오면서 다시 바틀비와 연루되고 만다. 사무실의 새로운 주인 또한 바틀비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새 주인에 따르면 바틀비는 아직도 퇴거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무실의 이전 주인인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변호사는 새 주인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바틀비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바틀비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변호사도 새 주인도 바틀비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결국 바틀비는 경찰에 의해 강제로 건물 밖으로 쫓겨난다. 쫓겨난 후에는 낮에는 계단에 앉아 있다가 밤이면 건물의 현관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이어나간다. 바틀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변호사는 도대체 바틀비가 왜 그러는지 알고 싶어 그를 식사에 초대했으나 바틀비는 ‘그렇게 안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로 거절한다. 얼마 뒤 바틀비는 방랑 죄 몫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감옥으로 바틀비를 찾아간 변호사는 간수에게 뇌물을 주어 바틀비에게 좋은 음식을 충분히 제공하도록 조치하였으나 바틀비는 변호사의 호의를 거절한다. 바틀비는 다만 “나는 그렇게 안하는 것을 선호합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바틀비는 굶어죽는다.

이 몰상식적인 내용이 소설의 전말이다. 어느 독자든 바틀비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쉽지 않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불편과 피해를 초래했으며 특히 전 고용주인 변호사와 사무실의 새로운 주인에게 충분히 피해를 끼쳤다. 그런데 작가도 친절하지 않다. 바틀비의 몰상식한 행동의 동기를 전혀 밝히지 않고 행동의 목적도 의도도 숨겨놓는다. 그런 까닭에 바틀비의 행동은 사회 부적응자의 이유 없는 반항처럼 여겨질 뿐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의 혀끝에서 ‘이 사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라는 말이 맴돌거나 ‘개또라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입 안을 채울지 모른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독자의 눈높이가 작품의 격을 결정하니까.

하여튼 소설은 새드 엔딩이다. 주인공이 죽었으니 이만한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바틀비의 죽음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물론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바틀비의 외침이 죽음으로 끝난 것을 두고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면 곧 죽음이라는 식의 공포스런 해석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바틀비의 죽음은 바틀비의 것이다. 자본주의의 명령이 아니다. 바틀비에게 죽음은 최후까지도 선택의 문제였다. 죽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그는 다만 거부했을 뿐이다. 그의 죽음은 자본주의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틀비의 죽음은 저항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해석해내야만 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그의 선언에서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는 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지 해석해야만 한다. 애덤 스미스 식으로 보면 창의성이나 사유라는 인간 본성일 수 있고, 들뢰즈 식으로 보면 ‘불확실한 주체’일 수도 있으며, 죽음마저 선택의 대상으로 인식한 측면에서는 실존주의적 자유의지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소설은 소통부재의 현실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바틀비는 온종일 문서 베끼는 일만 한다. 사람으로서의 사고는 필요도 없다. 변호사의 사무실은 사실상 인간이 도구화 된 그런 공간이다. 바틀비의 창문은 벽을 마주보고 있다. 그곳에 고립된 바틀비가 하지 않으려는 것은 베끼기 작업 외에 편지 부치기가 있다. 편지는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편지는 배달 불능의 것들이다. 이미 바틀비는 배달 불능의 편지들을 모아서 불태우는 곳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 배달 불능 편지들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 사회를 암시한다.

물론 의사소통 부재의 현실 고발도 중요한 의미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할 것은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바틀비의 선언이다. 특히 ‘그렇게’가 지시하는 바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실재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언제나 항상 베끼기에 여념이 없다. 뿐만 아니다. 우리는 전혀 행복하지 않음에도 그 일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 일은 어제의 그것과 다르지도 않다. 나를 더 깊게 하거나 더 넓게 하거나 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돈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꾹 참는데 익숙하고 혹사당하는데 익숙하다. 단순 반복이 아니라 무한 반복적인 일을 하고 있다. 이미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서 있다. 그런 까닭에 바틀비의 외침,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바틀비는 죽음으로 자신을 지켰지만 대다수의 우리들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뛰어내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정면응시 자체가 버거운 보통의 사람들로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바틀비는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환상을 준다. 능력 것 노력한 만큼 소유 가능하다는 교지에 따라 우리는 오늘도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리고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를 두고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자기긍정을 통한 자기파괴라고 불렀다. 일종의 자기 기만이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다. 아니 속인다. 그런 어느 순간 속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고 우리의 자아는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초라하거나 작아진다. 애덤 스미스의 경고처럼 용기도 삶의 활력도 모두 상실해버린다. 차라리 여우와 신포도 우화 속의 여우가 현명할지 모른다. 포도가 먹고 싶었던 여우는 여러 차례 반복적 시도에도 포도를 따먹을 수 없게 되자‘포도는 시다’라며 포도 따먹는 행위를 포기하고 길을 재촉해 떠난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포도나무 아래서 여전히 수 세기동안 점핑을 하고 있다. 손끝에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포도, 그 부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단순 반복적 노동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짧은 생은 그렇게 낭비되고 소모되어도 부자의 꿈은 폐기되지 않고 대를 이어 다음 세대에게 유산처럼 혹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너는 부자가 되어야 해’


이후 바틀비는 하나의 ‘바틀비 현상’되었다. 아감벤과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네그리 등의 철학적 아이디어가 되었고 과제가 된 문제적 인간 ‘바틀비’ 그는 단순 반복적 노동을 거부하고 자신의 본성을 지키고자 했으며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린 인간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이다. 반복적 일상과 노동으로 무력해진 우리들에게,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혹사당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는 말하고 있다. 창의와 상상과 자기 결단으로 돌아가라. 설령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 하더라도 회피하지 마라. 그것만이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바틀비는 하나의 세계다.


[참고 자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이재은 선생
다원교육 입시면접 / 자소서강의
독서클럽 ‘다독’ 소장
<최소한의 인문학>
<처음 읽는 신영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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