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곤 페이퍼 사건의 조연들

영화 <더 포스트>는 1971년 일어난 ‘펜타곤 페이퍼’ 특종 보도 사건을 다룬다. 《뉴욕 타임스》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담긴 기밀문서 ‘펜타콘 페이퍼’를 특종으로 보도하자, 네 명의 미국 대통령이 30여 년간 은폐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에, 백악관은 관련 보도를 전면 금지하고 국가 안보를 흔들었다는 사유로 《뉴욕 타임스》를 법원에 고발한다.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 떠오른 주인공은 아마도 《뉴욕 타임스》의 ‘기자’일 것이다. 정의감 넘치는 기자가 외압에 맞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야기, 혹은 야망에 휩싸인 편집부가 경쟁 언론사를 제치고 특종을 따내기 위해 분투하는 서사는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도식이다. 그러나 <더 포스트>는 기존의 ‘언론 영화’가 지켜온 특성과 어긋나는 지점을 내세운다. 첫째, 이 이야기의 무대는 실제 사건의 중심이었던 《뉴욕 타임스》 (이하, 《타임스》)가 아닌 《워싱턴 포스트》 (이하, 《포스트》)이다. 둘째, 영화의 주인공은 ‘기자’가 아닌 신문사의 ‘발행인’, 그것도 최초의 ‘여성’ 발행인 캐서린이다. 이런 차별점은 영화에 특색을 더함과 동시에 관객에게 특별한 의미를 전달한다.

《포스트》라는 무대와 ‘여성 발행인’ 캐릭터는 이전까지 주연이 아닌 ‘조연’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포스트》는 메인 언론사로 거듭나기를 꿈꿨지만, 언제나 경쟁사인 《타임스》에 선수를 빼앗겨왔다. 특종의 건수, 인지도, 구독자 수 등 모든 방면에서 《포스트》는 《타임스》에 미치지 못했다. 《타임스》가 능숙하게 앞서나가면, 《포스트》는 급급하게 따라가는 실정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직업적 소명은 남성의 몫이었던 시대였기에, 캐서린을 비롯한 여성들은 팔로워의 위치에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1등을 따라잡기 위해 분투하는 후발주자와 절대다수의 남성과 함께 치열하게 일하는 여성. 실제 사건에선 조연이었던 이들이 극 중에서 조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직업적 소임을 다하면서도, 그저 주연을 따라가기 급급하거나, 경쟁자를 깎아내리는 것에 골몰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도 사회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리더로서 갖춰야 할 윤리 의식을 잃지 않았다.

조연을 주연으로 만들어낸 힘

캐서린은 《포스트》의 발전을 위해 주식 상장을 추진한다. 주식 상장을 통해 자금력을 확보한 뒤, 이를 기반으로 우수한 기자들을 고용하기 위함이었다. 캐서린에게는 기사의 질을 높임으로써 회사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사회 앞에 선 캐서린은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한다. 여성으로서의 캐서린은 늘 남성들의 뒤에 있었고, 스스로조차도 직업적 리더십은 남성이 발휘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최초의 여성 리더를 신뢰하지 않고, 그로 인해 캐서린은 점점 주눅이 든다. 주변의 불신과 그녀의 불안이 공명하듯 증폭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런 캐서린을 한 사람의 직업인이자 리더로 거듭나게 해준 것은 그녀의 윤리적인 결정과 행동이다. 자신의 절친한 지인이 얽혀있다는 이유, 보도 금지 지침을 무시하면 백악관에 밉보일 것이 뻔하다는 이유, 상장에 실패하여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이유 등 나름대로 타당한 명제들 앞에서 캐서린은 언론사의 발행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적인 결정을 한다. 더 나아가, 캐서린 개인의 안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다시금 윤리적인 행보를 이어간다. 윤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지키기 위해 애쓴 캐서린은 더 이상 외풍에 흔들리는 가련한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단단한 직업인, 그리고 언론사의 진정한 리더로 거듭나게 된다.

《포스트》의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편집국장 벤은 ‘만년 2등’이라는 패배 의식에 젖어있지 않았다. 백악관의 강경한 보도 금지 지침 이후에도, 후속 보도를 이어가기 위해 분투하였고 마침내 펜타곤 페이퍼를 손에 넣게 된다. 주식 상장 건으로 몸을 사리길 원하던 이사회가 후속 보도를 반대하자, 그는 맹렬한 기세로 출판의 권리를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지고, 나라 전체가 지고, 닉슨이 이긴다고요! 닉슨은 이번에도 이기도 다음번에도 이기고 그 다음에도 이기겠죠. 우리가 겁먹었기 때문에요. 출판할 권리를 주장할 유일한 방법은 출판하는 것뿐이란 말입니다.”

벤은 누구보다 《타임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다. 영화가 언론사의 경쟁을 다루었더라면, 벤은 상대 언론사가 처한 위기를 《포스트》의 기회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경쟁을 초월한 ‘언론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백악관의 《타임스》를 검열하는 것은 결국 《포스트》를 검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단일 신문사들은 단순한 경쟁 관계가 아니며, 다양한 언론사는 다양한 목소리를 위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권력에 굴종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의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한다면, ‘검열되어야 마땅한’ 언론사는 없다는 것이 벤이 언론인으로서 가진 윤리 의식이었다.

이처럼, 《포스트》의 두 수장은 각자의 방식으로 윤리적인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 결단을 번복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간다. 조연들의 윤리적인 행동은 결국 출판의 권리 수호라는 결말을 이끌었다. 캐서린, 그리고 《포스트》는 <더 포스트>의 주연이 되기에 충분한 존재들이었다.

언론의 윤리, 우리의 윤리

출판의 자유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러나 출판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특종 보도에만 열을 올리고, 사실을 왜곡하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조회 수를 올리고, ‘아니면 말고’라는 태도로 잘못된 기사를 송출한 뒤 눈에 보이지도 않게 정정 보도를 내는 실망스러운 언론의 모습을 보면, 언론에 주어진 자유와 권리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회의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언론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출혈 경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극을 위한 자극을 하고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거나, 정상을 비정상으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러 이유로 억눌려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출판함으로써 출판의 권리를 지켜가는 것, 그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이자 언론이 지켜야 할 윤리이다. 이는 비단 언론뿐 아니라, 매일같이 미디어를 접하는 우리들 역시 잊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우리 자신도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의 비윤리적 행보를 감시해야 하며, 언론이 스스로 권력이 되어 누군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윤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의 주연이기 때문이다.

작품 소개

제목 더 포스트 (The Post, 2017; 국내개봉:2018.02.28)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내용 1971년,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폭로되기 시작하자 백악관은 보도 금지 지침을 내리고,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은 언론의 자유와 회사의 존속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정선희 작가
서강대학교 사학•신문방송학 학사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연극영화전공 석사
교보문고 스토리 에이전시 소속 작가
소설 <연인 광복군> 저자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