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위기는 기회라는 말은 큰 힘이 된다. 지금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면, 더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라는 말이 꼭 긍정의 변화를 내포하지 않는다는 점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전쟁, 기근, 전염병, 정치적 혼란 등 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낚아챈 기회는 ‘우리’보다는 ‘나’, 더 나아가 ‘오직 나만을’ 위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평천하」의 윤직원이 그러하다. 구한말, 그는 탐욕스러운 수령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불한당 같은 화적들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윤직원은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며 외친다.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고,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버리라고. 그 뒤로 윤직원은 더욱 악착같이 재산을 모은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온갖 추태를 부린다. 그렇게 만석꾼이 된 이후에도 그는 변하지 않는다. 알아서 값을 쳐달라는 인력거꾼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으려고 버티고, 잔돈이 없다는 핑계로 버스를 공짜로 얻어 타며, 밥에 보리를 섞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 집안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역정을 낸다. 다른 사람의 처지야, 다른 이의 마음이야 어떻든 중요하지 않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지런히 산 덕분에’ 쌓은 재산으로 족보를 사서 금칠을 한 윤직원은 당당한 양반 신분이 되어 자녀들을 양반집 자제들과 혼인 시켜 변변한 문벌을 얻는다. 이제 그가 원하는 건 두 손주를 각각 군수와 경찰청장으로 만들어 진정으로 권세 있고 실속 있는 양반 가문이 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왔건만 – 그렇게 생각했건만- , 그의 삶은 일순간에 풍비박산 난다. 경찰서장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둘째 손자, 일본 유학까지 보내며 온갖 기대를 쏟았던 종학이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그것도 윤직원이 증오해 마지않는 사회주의 사상에 빠졌다는 이유로 말이다.

마음의 빈민굴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년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을 하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태평천하」


윤직원은 시대에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죽인 화적떼는 사실 아버지가 과도하게 수탈하여 원망을 품은 소작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일제의 침탈로 인한 민족의 피해나 자주성의 훼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나만이’ 잘 먹고 잘사는 것에 골몰했다. 강력한 통치로 질서를 잡아주어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일본은 그저 고마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일본이 제 힘을 발휘해 조선인들을 지켜주는데, 왜 바보같이 일본의 통치에 반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신세가 다른 것이야 어느 시대에나 있던 당연한 이치인데,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줘야 한다는 사회주의 사상은 윤직원을 분노케 했다.

사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봄 직하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당장 나와 내 가족의 살길이 급급한 처지에 타인을 돌보고 주변과 함께하는 마음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의 주변, 내가 속한 사회를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쫓는 빈곤한 이기주의는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에게 향하기 마련이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내가 세상을 바꿀 순 없다’는 핑계를 댄다. 아무리 애써봐야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으니 나만 잘살면 된다고 말이다. 그 말을 뒤집어보면, 결국 개인은 거대한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사람은 시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 없다. 윤직원을 보자. 그는 국가의 문제따위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손자는 그가 가장 증오하고 외면하면 사회주의 운동 혐의로 체포되고 만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댓가가 정통으로 윤직원을 향한 것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윤직원은 이 지경에 이르고서도 후회나 반성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그가 나의 안위를 챙긴 뒤에라도 ‘우리’를 생각했더라면, 한 번이라도 사회와 국가에 대해 생각했더라면, 어쩌며 그는 마지막 순간에나마 반성이라는 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주변을 돌아볼 걸 그랬다고, 조금 더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볼 걸 그랬다고 말이다. 안쓰럽게도, 반성하지 못하는 윤직원에게는 더한 나락이 기다릴 뿐이다. 그저 이 태평세상을 스스로 산산조각 낸 손자에게 분노하고 그가 쌓아온 세상이 무너진 것에 대해 원통해 할 일만 남은 것이다.

생존 본능, 그다음에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면, 그 뒤에라도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진 능력이다. 미처 적절한 시기에 그러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뒤늦게나마 반성하고 후회하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이다.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빈민굴에 갇힐 뿐이다. 자신이 힘겹게 쌓아 올린 아성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시대는 공평하지 않다. 나에게는 태평천하인 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힘든 시간일 수도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위기의 순간에 발 벗고 나서는 의인이 되진 못하더라도 나와 주변을 함께 고려하여 사람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소개

제목: 「태평천하」

저자: 채만식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출간일: 2005.01.25

정선희 작가
서강대학교 사학•신문방송학 학사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연극영화전공 석사
교보문고 스토리 에이전시 소속 작가
소설 <연인 광복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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