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만학의 여왕이라 불렸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철학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역사는 한 마디로 ‘상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철학으로부터 만학의 여왕이라는 지위를 앗아가면서, 철학이 다루던 많은 분과 영역들을 차지하고 나타난 것은 자연과학이었다. 자연과학의 폭발적인 성장, 근대 자연과학이 전례 없는 성과를 이룩한 것을 두고 우리는 ‘과학 혁명’이라 부른다. 역학을 중심으로 한 물리학, 연금술을 벗어나 학문의 지위를 얻게 된 화학, 생물에 대한 분류 체계를 정립하고 창조론을 뒤엎은 생물학 등은 지식 성장 폭과 깊이에서뿐만이 아니라 그 속도에서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사람들은 자연과학이 이룩한 이러한 혁혁한 성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신학, 문학, 철학 등은 ‘진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조차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과학이 이렇게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이 과학의 합리성에서 찾았다. 논리 실증주의자들(logical positivists)은 과학이 귀납주의 논리와 함께 경험적 증거들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한다고 주장했다. 칼 포퍼(Karl Popper)는 아주 단순한 논리만으로 이들의 주장을 박살내 버렸다. 그러고 등장한 것인 칼 포퍼의 반증주의이다. 반증주의(falsificationism)는 연역 논리를 통해 과학의 논리성을 확보하려 했다. 과학의 진리 탐구가 논리에 기초해 있지 않다면, 과학이 이룩한 성과는 사상누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반증주의는 대단히 명쾌한 논리를 통해 과학을 과학이 아닌 것과 구별해 주는 입장으로서 성공한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자들이 반증주의의 주장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포퍼의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기나 하듯이 가설을 기각시켜야 하는 반례를 과학자들은 버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즉, 반례가 나타나면 가설이 반증된 것인데, 이때 과학자들은 가설을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반례를 폐기처분하는 것이었다.

칼 포퍼(Karl Popper)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과학자들의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의 성과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도록 해 준다고 믿었던 과학의 ‘합리성’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논점을 그대로 담고 등장한 것이 바로 토머스 쿤(Thomas Kuhn)의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이다. 그리고 『과학 혁명의 구조』는 학문적 측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의심케 하고 과학적 진리조차 상대적일 수 있다는 함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은 자신이 상대주의자가 아닌 듯이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의 논리를 따라가면 상대주의가 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과학적 진리의 확실성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켰다.

그렇다면 과학의 정체성에 대한 쿤의 인식은 어떤 것일까? 그의 입장을 알기 위해 우리는 일반적인 과학적 탐구의 방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과학을 과학이 아닌 다른 것들과 구별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경험적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조건 하에서 실험을 하면 동일한 결과를 관찰할 수 있고, 또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 과학적 진리의 한 가지 요구 사항이다. 과학적 진리는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샤를의 법칙은 보편적이다. 압력이 일정할 때 기체의 온도가 높아지면 부피가 커지고 기체의 온도가 낮아지면 부피가 작아진다는 샤를의 법칙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이집트든 브라질이든 독일이든 어디에서 실험을 하든 동일한 결과가 나타난다. 샤를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남자든 여자든, 누가 관찰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난다. 이처럼 관찰의 동일성이 과학의 경험적 증거의 동일성을 보장하고, 이로부터 과학적 진리의 객관성을 보장하게 된다.

자, 다음 그림을 보고, 무엇으로 보이는지 말해 보자.

우리 대부분은 이 그림이 오리로도 보이고 토끼로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오리를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래서 ‘오리’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이 그림에서 오리를 읽어 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토끼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그림에서 토끼를 볼 수 없다. 이 단순한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파괴적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볼 수 없다는 발견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관찰은 이론에 의존한다는 ‘관찰의 이론 의존성’ 또는 ‘관찰의 이론 적재성’ 테제가 제안되었다.

관찰의 이론 적재성 테제가 어째서 파괴적인가? 즉, 개념이 없다면 어떤 대상을 읽어 낼 수 없다는 것이 왜 파괴적인가?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이론적 배경 없이도 동일한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신념이 깨졌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누가 관찰하든 동일한 관찰이 이루어져야 과학의 객관성이 보장될 수 있는데, 특정한 이론이 배경으로 작동하여 서로 다른 관찰을 일으킨다면, 과학의 객관성이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과학적 진리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는 큰 틀에서 이러한 인식과 과학관을 담고 있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토마스 쿤의 과학관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패러다임(paradigm)’은 본디 모범적인 사례를 뜻한다. 예를 들어, 수학에서 미분 개념을 처음 배울 때 특정 그래프를 이용해 변화율을 설명하는데, 이때 든 예가 바로 패러다임인 것이다. 이 예는 미분을 이해하기 위해 제시된 가장 모범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이 인상적인 모범 사례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과학자 집단이 공유하는 ‘전문 분야의 매트릭스’라 할 수 있다. 이 어려운 용어는 접어 두고, 간략히 이해하자면,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일반화된 기호, 쉽게 이야기하면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배우는 공식과 그 공식을 표현하기 위한 기호들이라 생각하면 된다. 쿤은 ‘패러다임의 형이상학적 부분’이라 부르는 것도 제시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세계에 대한 상(像), 즉 세계관이라 생각하면 된다. 쿤은 정확히는 ‘모델’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공유된 가치도 패러다임의 여러 의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패러다임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그냥 세계에 대한 인식 틀이라 생각하면 된다. 즉 패러다임은 프레임(frame)이다.

인식 틀, 즉 프레임으로서의 패러다임은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지각과 인식을 지배한다. 우리가 어떤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인다. 즉 우리가 장착한 프레임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인식된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 쳤을 때, 고대 그리스인들은 제우스가 노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구름을 이루는 입자들이 전기를 일으켰다고 생각할 것이다. 신화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차이로 인해 같은 현상으로 보고도 이렇게 서로 다른 인식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이 어떤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받느냐에 따라 세계에 대한 그들의 과학적 인식이 달라진다. 천동설의 패러다임을 갖고 있느냐 지동설의 패러다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태양의 운동을 동일하게 보고도 하늘이 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지구가 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패러다임은 세계에 대한 과학자들의 인식 틀로서 기능한다.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은 패러다임이 지배한다. 특정한 하나의 패러다임이 지배할 때를 토마스 쿤은 ‘정상 과학(normal science)’라 부른다. 정상 과학의 시기란 지배적인 패러다임 하에 과학자들이 일정한 근본 개념들을 공유한 상태에서 공유된 연구 방법들을 이용하여 공유된 문제 의식을 갖고 연구하는 활동이다. 뉴턴 역학이 지배하는 정상 과학의 시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역학 연구를 수행하지 않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탐구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정상 과학의 시기에만 연구된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정상 과학의 시기에는 교과서가 쓰인다. 이 교과서를 통해 인식 틀을 공유하게 된다. 그 덕분에 과학 활동을 위한 새로운 개념 형성이나 공식화를 맨땅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다. 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도 패러다임에 의해 결정된다. 토머스 쿤은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활동을 퍼즐 풀이라 했다. 정상 과학 시기에는 이처럼 교과서가 만들어지고, 이전 패러다임에 의해 설명되었던 현상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설명하고, 아직 풀지 못한 문제들을 풀기 위한 활동들이 이루어진다.

쿤은 패러다임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들을 ‘변칙(anomaly)’이라 부른다. 포퍼는 이런 현상을 반례라 하여 가설을 논박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보지만, 쿤은 이런 현상은 단지 규칙에 어긋나는 이상한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정상 과학의 시기에는 패러다임에 어긋나는 이러한 변칙들이 나타나도 처음에는 관찰되지 않는다. 앞의 <오리-토끼 그림>에서 보았듯이, 관찰은 이론 적재성 또는 이론 의존성을 띠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현상만 관찰되기 때문에 그 패러다임에 일치하지 않는 ‘이상한’ 현상들은 무시되기도 하고 관찰조차 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변칙이 누적되면? 양적인 축적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듯이, 변칙이 누적되면 지배적 패러다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행성의 운동을 예측해도 잘 맞지 않자 이제는 아예 지구가 돈다는 생각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물론 지동설이 등장했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모두 지동설을 믿은 것도 아니고, 지동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동설의 등장은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을 뜻하며, 기존 패러다임의 전복을 통해 새로운 우주관으로의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을 쿤은 ‘혁명’이라 불렀다. 그래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과학 혁명’이다. 이것은 마치 개종하는 것과도 같고, 정부가 뒤집어엎어지는 것과도 같아 ‘혁명’이라는 말을 붙였다고 한다. 태양을 비롯한 천구가 돈다는 생각에서 지구가 돈다는 생각으로의 전환은 쉽게 되지 않는다. 사고의 혁명만이 이 전환을 가능케 한다.

앞서 말했지만, 패러다임은 완전하지 못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역시 완전하지 못했다. 그가 제시한 지동설 체계에서도 천동설에서 존재하던 주전원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의 행성 궤도는 원이었다. 태양으로부터의 행성들의 거리가 비례 관계를 띠고 있는 것도 왜 그런 것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렇게 불완전한 지동설 체계가 케플러를 거치고 뉴턴을 거쳐 완성되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정상 과학의 시기에, 케플러는 타원 궤도의 법칙,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 조화의 법칙 등으로 기호적 일반화를 시도하면서 지동설을 더욱 세련된 형태로 만들었고,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태 근대의 천문학 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그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는 일종의 근대 역학과 천문학의 교과서가 된다.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제목이 드러내듯이 토머스 쿤은 과학 혁명이 일어나는 구조가 있음을 밝힌다. 그는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는 과학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패러다임의 이동(paradigm shift)이 어떻게 일어나 과학 혁명이 일어나는지 등을 밝히고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렇지, 과학의 패러다임이 이렇게 발전적으로 바뀐 것이지. 쿤이 잘 설명했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학 혁명의 구조 이면에 깃들어 있는 급진적인 생각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 생각들이 쿤을 상대주의로 흐르게 한다.

그 생각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패러다임 간의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다. 말이 대단히 어렵지만 간략히 이해하자면, 패러다임들 사이에 공통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12와 18은 2, 3, 6과 같은 공약수가 존재한다. 그러나 패러다임 간에는 그러한 공약수 같은 공통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패러다임에서 사용하는 근본 개념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에서는 ‘질량’이라는 단어가 있고 ‘m’으로 표현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도 ‘질량’이라는 단어가 있고 ‘m’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 둘은 기호만 같을 뿐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뉴턴에게서의 질량은 변하지 않는 절대 질량이지만, 아인슈타인에게서의 질량은 변하는 상대 질량이다. 뉴턴의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게의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시공간’이며 빛의 속도에 상대적이다. 이렇게 각 이론을 구성하는 근본 개념들이 서로 다르다.

이러한 공약 불가능성은 비교 불가능성을 이끌어 낸다. 패러다임 간의 공약 불가능성은 공통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에 패러다임 간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패러다임 간의 비교 불가능성으로 인해 과학적 진리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쿤의 주장대로 패러다임 간 비교 불가능하다면, 천동설보다 지동설이 더 나을 것도 없다. 그냥 천구의 운동을 설명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론이 있는 것이다. 뉴턴 물리학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현대 양자 역학이 더 나은 이론이 아니다. 이 역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쿤은 자신이 제시한 공약 불가능성으로 인해 이러한 상대주의 과학관으로 흐르게 된다. 심지어 과학자들이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을 쿤은 ‘개종’이라 표현하는데, 이것은 그러한 패러다임의 이동에서 어떤 합리적 근거도 없음을 뜻한다. 과학의 합리성과 객관성을 의심케 하는 이런 내용은 사실 쿤 스스로를 엄청 고민에 휩싸이게 한 것 같다.

세계적인 과학철학자인 이언 해킹(Ian Hacking)은 『과학 혁명의 구조』 50주년 기념 제4판의 서론을 쓰면서 이 문제를 다뤘다. 그는 쿤의 공약 불가능성 개념을 근거로 쿤이 과학을 비합리적이고 상대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리석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쿤 역시 이론의 예측 정확성, 무모순성, 광범위한 적용 가능성, 정합성, 새로운 현상들의 관계 제시에서의 효과 등 다섯 가지 가치에 쿤 역시 동의하기 때문에 쿤을 합리주의자라 평한다. 그의 말대로 쿤의 제시한 다섯 가지 가치들을 기준으로 삼아 어떤 이론이 더 나은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약 불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과학의 합리성을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비합리적이다. 아니면 쿤의 입장을 어거지로 합리화한 것에 불과하다. 쿤은 과학 혁명을 ‘개종’으로 명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과학자들이 ‘개종’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쿤에게서의 개종은 과학자들의 심리적인 현상일 뿐이고, 주관적인 것이기에 어떤 합리적 이유나 근거도 제시될 수 없는 듯이 말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물을 수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왜 그런 개종의 심리적 동기가 생기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쿤은 이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만일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가치들로 인해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개종’이나 심리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비합리적이다. 아니면 쿤의 입장을 어거지로 합리화한 것에 불과하다. 쿤은 과학 혁명을 ‘개종’으로 명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과학자들이 ‘개종’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쿤에게서의 개종은 과학자들의 심리적인 현상일 뿐이고, 주관적인 것이기에 어떤 합리적 이유나 근거도 제시될 수 없는 듯이 말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물을 수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왜 그런 개종의 심리적 동기가 생기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쿤은 이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만일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가치들로 인해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개종’이나 심리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패러다임 간의 공약 불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곧바로 비교 불가능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근본 개념들 간의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 공약 불가능성일 뿐, 동일한 현상에 대해 어떤 이론이나 패러다임이 더 잘 설명하는지는 비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언 해킹이 말하는 의도는 이해할 법하다. 그러나 공약 불가능성을 비교 불가능성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제시한 책임은 사실 쿤에게 있다. 쿤 자신이 스스로를 비합리주의자이자 상대주의자로 보이게 만든 것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는 대단히 독창적이고도 흥미로운 생각들을 담고 있는 훌륭한 책이다. 특히 1950년대 전후에 유행하게 된 상대주의 진리관과 통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당시 여러 분야에서 그러한 상대주의적 관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은 그 자신이 상대주의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듯하나 이를 극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의 혁명적 아이디어는 자기 파괴적이라는 점에서도 혁명적이었다.

이명순
개논비연구소 대표/ 다원교육 입시연구소 부소장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사 석사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 수료
Boston University Visiting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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