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영주가 맞이한 전환점

열아홉 살은 참 애매한 시기이다. 어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주민등록증을 받았음에도, 정작 성인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나이이다. 그런데 또 어느 순간에는, ‘너도 이제 다 컸으니’, ‘내일모레면 성인이니’ 어른처럼 행동하라고 요구받는 시기이다. 나는 어른인지, 아이인지, 혼란스러운 나이인 열아홉은 인생의 전환을 맞이하는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그런 열아홉을 유독 아프게 보낸 아이가 있다. 영화 <영주>의 주인공 영주이다. 영주는 열네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마냥 울고만 있기에는 아직 어린 동생이 있었다. 가장이 된 영주는 어떻게든 돈을 벌고 동생 영인을 부양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도 각박하다. 영인은 자꾸만 엇나가고, 그동안 그럭저럭 영주를 도와줬던 고모네 마저 손을 떼기 시작한다. 사고를 친 영인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을 받으려다 사기까지 당한다. 싸늘하게 식은 부모님의 제사상 앞에서,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영주의 분노는 한 사람에게 향한다. 부모님을 죽게 만든 교통사고 가해자, 영주는 그를 찾아가기로 한다. 이것이 영주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문제는 그 가해자 부부가 너무도 따뜻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복수심에 찾아온 영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부부는 영주는 딸처럼 예뻐한다. 영주는 그들과 함께하며 혼란스러워진다. 교통사고를 내내 후회하는 가해자 상문, 영주를 엄마처럼 살뜰히 챙겨주는 가해자의 아내 향숙,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두 부부의 아들까지. 영주는 더 이상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아니, 더 나아가 그들에게 마음을 줘버리고 만다. ‘너는 이제 곧 어른’이라고 다그치는 세상과는 달리, 너는 좋은 아이라고, 앞날이 창창하니 뭐든지 다 해보라고 말해주는 부부는 영주가 늘 그리워하던 부모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이는 영주에게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너무도 위태롭다. 부부는 영주가 교통사고 피해자의 딸임을 모르고 있고, 영주는 차마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영주는 부모님이 떠난 이래 처음으로 받아오는 ‘어른’의 따뜻한 보살핌을 놓고 싶지 않다. 이 따뜻한 순간을 조금만 더 누리고픈 어린아이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알게 된 영인은 부모의 원수와 함께 웃는 누나를 비난한다. 영인과 크게 다툰 영주는 그 길로 부부를 찾아간다. 진실을 털어놓아도 부부는 자신을 변함없이 대해줄 거라 믿는다. 영주의 이러한 선택은 세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선 주인공

일반적으로, 영화 속의 ‘터닝 포인트’는 분명하고 또렷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고 규정한 이래로 이어져 내려온 일종의 작법 상의 미덕이다. 이때, 이야기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르는 요소는 전환점, 즉 터닝 포인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최소 3번의 터닝 포인트를 찾을 수 있다. 만약 이 터닝 포인트들이 충분히 눈에 띄지 않거나 지나치게 터무니없이 그려진다면, 이야기의 재미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터닝 포인트의 특징은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극적인 사건들을 경험하고 그를 통해 변화한다. 주인공이 겪는 변화는 이전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변화이다. 어떠한 일을 겪기 전의 주인공과 그 이후의 주인공이 똑같다면, 이는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없다. 가령, 해리포터의 주인공 해리가 호그와트에서 온 편지를 받고도 입학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신비로운 부엉이가 날아온 들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가해자를 마주한 영주가 어떠한 마음의 동요도 겪지 않았다면, 삶을 바라보는 영주의 시각은 열아홉에 멈춰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리는 호그와트에 입학했고 영주는 가해자를 만난 뒤 전에 없이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이 순간을 경험한 주인공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해리는 마법사로 성장하고 영주는 어른이 되어간다.

삶 속에서, 어떤 터닝 포인트들은 굉장히 희망차고 아름다운 사건들로 찾아온다. 그와는 정반대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천천히 스며든 탓에 이것이 내 인생을 가를 중대한 사건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때도 있다. 어디서부터가 터닝 포인트라 칭할 만한 사건이었는지 분명히 짚어내기 어려울 때도 많다. 한 사람의 삶은 가공된 이야기들처럼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명확히 가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주인공이 행동하지 않는 사건은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영주는 몰아치는 불행 속에서 가해자를 찾아가는 행동을 했다. 가해자를 마주한 뒤에는 그들과 교감했다.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다. 모든 순간이 시련이었고, 비록 그 끝은 그려놓은 듯한 해피엔딩이 아니었지만, 영주는 다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영주는 이제 마냥 불쌍한 어른 아이에서 벗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설 줄 아는 어른이 될 것이다.

12월은 지난해와 새로운 해의 전환점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저 달력의 숫자가 12월에서 1월로 바뀔 뿐, 그 변화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터닝 포인트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지만, 그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주인공이다. 당장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행동하는 주인공은 반드시 다음 전환점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작품소개

제목 영주 (2017, 개봉:2018.11.22)

감독 차성덕

내용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가장이 된 열아홉 살 영주는 냉혹한 현실을 견디다 못해 결국 부모를 죽게 만든 교통사고 가해자를 찾아간다.

정선희 작가
서강대학교 사학•신문방송학 학사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연극영화전공 석사
교보문고 스토리 에이전시 소속 작가
소설 <연인 광복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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