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절대적 가치가 되는 사회. 이것이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이다. 사회적 가치는 다양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모든 가치가 돈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사회적 가치들의 영역이 단 하나의 가치에 지배되는 경우를 마이클 왈쩌는 불의(不義)라고 규정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 제도적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사회가 불의하다면, 생활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천박한 사회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하는 최소한의 윤리조차 결여하면서 돈을 세상의 유일한 잣대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더욱 천박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조차 ‘Show me the money’라는 말이나 태도를 금기시한다는 것이다. 교양인인 척하는 속물들의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 가장 어울릴 법한 표현은 ‘천민 자본주의(pariah capitalism)’라 생각한다.

생각할수록, 적절해서 멋진 표현이라 생각되는 ‘천민 자본주의’의 ‘천민’은 영어로 ‘pariah’로 이것은 단순히 계급이 낮은 천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촉 천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천박한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손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표현을 만든 이가 막스 베버(Max Weber)다. 막스 베버는 자칫 천박성을 띨 수 있는 자본주의가 건전한 부의 축적을 이루는 경제 시스템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통해 보여 준다. 물론 막스 베버의 문제 의식은 천민 자본주의를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문제 의식은 왜 카톨릭(Catholic)이 아닌 개신교(protestant)들의 지역에서 자본가들이 많이 나왔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물과 기름의 관계와 같은 이 ‘자본’과 ‘금욕’이 어떻게 서로 어울리게 되었는지를 탐구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설명하고자 한다.

막스 베버(Max Weber)

막스 베버는 칼 마르크스와 같은 유물론적인 관점에 맞서 정신성의 우위를 지켜내고자 한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자연과 인간의 교섭 관계, 즉 인간이 자연의 물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관계를 통해 설명하려 했다면,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적 윤리가 자본주의 발달의 토대가 되었음을 밝히려 했다. 이런 점에서 베버에게 붙은 ‘사회학의 칸트’라는 별칭은 참으로 잘 어울린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하부 구조(substructure)와 상부 구조(superstructure)로 설명한다. 하부 구조는 물질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관계, 즉 경제적 생산관계를 이른다. 상부 구조는 정치, 종교, 문화 등의 영역으로 인간 의식의 구조물이다. 유물론자인 마르크스는 경제적 생산관계가 결국 의식의 측면을 규정하거나 결정한다고 보았다. 주인과 노예, 영주와 농노 등이 그러한 생산관계의 예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이다. 이러한 생산관계에 의해 정치나 법, 문화 등의 상부구조가 결정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역사는 이러한 생산관계가 변증법적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겪는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역사 유물론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역사 유물론과 함께 <자본론>을 통해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얻은 잉여 이익을 통해 더욱 부자가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갈등과 대립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발달을 설명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핵심은 돈이다.

그러나 막스 베버는 이러한 유물론적인 접근과는 상이한 접근을 한다. 특히 그의 문제 제기는 역설적인 현상의 묘사로 나타난다. 그게 앞서 말한 돈, 즉 ‘자본’이라는 기름을 ‘금욕’이라는 물과 섞는 것이었다. 이 섞임은 물질이 정신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금욕주의라는 기독교 윤리가 돈에 대한 탐욕을 추동하는 자본주의를 통제하는 핵심 과정을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으로부터 설명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 (마태복음 19장 24절)

성경의 이 말씀이 표현하는 것은 탐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을 금욕주의(ascetism)라 한다. 자신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다. 카톨릭교도들(구교)은 이 말씀을 잘 지키며 금욕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개신교도들(protestants) 중에는 이 말씀과 배치되는 기업가가 나왔고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이 나왔다. 표면적으로 이런 현상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탐욕주의로 보인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실마리는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예정설에서 비롯된다. 예정설이란 구원이 이미 정해졌다는 주장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지 여부이다. 종교가 삶을, 정신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이 곧 삶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사후의 구원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어느 정도로 강하게 결정된 것이냐 하면, 신에게 기도를 해도 바꿀 수 없고, 심지어 신조차도 바꿀 수 없는 결정이다. 그렇다면 신앙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 여부가 삶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능케 하는 것이 여기서 역설적이게도 탐욕의 표본인 돈이다. 돈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이 구원을 확인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돈을 정직하게 모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실하기만 하다고 돈을 잘 모을 수는 없다. 재주만 넘는 곰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돈을 제대로 벌려면 합리적이기도 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도 체계적으로 해야 하고, 돈을 관리하는 것도 체계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이러한 성실성과 합리성이라는 두 특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직업 윤리다.

우리말로 ‘직업’이라는 단어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calling’이라는 영어 단어나 ‘Beruf’라는 독일어에서는 드러나는 의미가 있다. 사실 ‘vocation’, ‘profession’과 같이 직업을 표현하는 영어의 단어들도 모두 의미 상의 뿌리는 같다. 이 모든 것들은 말소리, 즉 부름과 관련 있다. 그렇다면 직업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다. 누가 부르는 것일까? 바로 신(God)이다. 직업이란 곧 신의 부르심이다. 다시 말해 직업은 신이 명령한 일이다. 직업이 신의 명령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소홀히 할 수 있을까? 구원을 절체절명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아주 성실히 해야 한다. 신의 명령은 곧 나의 의무이다. 여기에서 바로 속세적 충동이 종교적 의무의 옷을 입게 된다. 열심히, 성실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돈을 버는 것, 그것도 많이 버는 것이 바로 신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이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면 수행할수록 돈을 많이 벌게 된다. 자신이 축적한 부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신의 의무를 이행했는지를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의 확신에 대한 표지가 된다. 물론 여기에서는 비약이 있다. 돈을 버는 것, 즉 부를 축적 정도가 구원의 결정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데에는 분명 비약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자들의 몫이다. 일반 사람들은 ‘소명(召命: 신의 부르심)’에 대한 근면한 수행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믿음이 중요할 뿐이다.

직업 노동을 성실하게 하면 돈을 모으게 된다. 그리고 이 명령은 체계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시간이나 에너지, 그리고 돈 그 자체의 낭비 없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직업 노동은 신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은 돈은 또 다시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생산에 다시 활용되어 돈을 또 모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순환의 과정을 통해 부는 자꾸 축적된다. 부자가 되는 것이다. 축적된 부는 생산적으로 투자되면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다.

여기에서 금욕주의라는 기독교 윤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바로 탐욕의 금지이다. 축적된 돈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물질적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게다가 이 돈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번 돈이지만 자신을 위한 돈이 아니다. 이 돈은 단지 신의 명령을 수행해서 부수적으로 따라온 것뿐이다. 보다 정확히는 ‘인간은 단지 신의 은총으로 자신에게 배당된 재화의 청지기일 뿐’이다. 돈은 욕구 충족의 수단도, 능력의 입증 표지도 과시의 도구도 아니다. 오히려 돈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위탁된 것’이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돈을 소비한다면, 이는 금욕주의적 도덕을 어긴 것이다.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번 돈을 이웃을 위해 써야 한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필요를 위해 쓴다. 그것이 신의 명령이다. 그렇게 쓰는 돈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드러낸다. 돈을 모은 것이 신의 은총이라면, 기부는 신의 은총을 드러낼 기회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부자들은 기부를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은 우리들에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떠올리게 해 주지만,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노블리스(noblesse)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를 떠올리게 해 주었을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부자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을 신의 명령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이런 설명은 유럽이나 미국의 거부들이 기부를 많이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물론, 그들이 기부를 통해 세금을 면제 받는다는 현실적인 경제적 이익이 기부의 동기일 수도 있지만, 빌 게이츠 같이 재산의 대부분을 자녀가 아닌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그런 경제적 이익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서구 사회에서 거부가 기부를 많이 하는 전통은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 윤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적인 부의 축적과 사회를 위한 기부는 모두 종교적 정신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금욕주의가 결여된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막스 베버는 ‘모험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투기’라는 표현이다. 이는 물론 막스 베버가 사용한 표현이다. 투기적 자본주의를 일러 베버는 ‘천민 자본주의(pariah capitalism)’라 했다. 그는 금욕주의적이지 않은, 즉 탐욕적인 자본주의를 천민 자본주의라 했다. ‘천민’이라는 표현은 자본주의가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경제 시스템임을 보여 준다. 인간성이나 윤리성은 사라지고 돈만을 위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질 때 천민 자본주의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투기적 성격 역시 마찬가지이다. ‘투기’란 자본 투자를 통한 차익 거래를 노리는 것이다. 즉, 자본의 차익만을 노리는 것이 투기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투기적 성격을 은폐시켜 사용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갭 투자다.

베버는 이미 부의 축적이 가져오는 굴레를 간파했다. 인간이 돈에 종속되는 현상을 간파했다.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경제는 인간의 정신성과 윤리성을 사상시키기 때문에 천박하다. 이런 자본주의 하에서의 인간은 말 그대로 자본의 노예다. ‘천민(pariah)’인 것이다.

이명순
개논비연구소 대표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사 석사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 수료
Boston University Visiting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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