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책,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다.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게 시작한다. 처음부터 독특한 관점에서 화두를 던지는 한병철 교수는 철학과 정신분석학 등을 넘나들며 자신의 테제(thesis)를 전개한다. 특히 질병을 통해 현대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참신한 접근법을 보여 준다. 그의 사회 비판은 병리학적 관점이라는 개성과 비판 이론 1세대의 ‘부정 변증법’과 같은 논리, 게다가 치유적 피로라는 역설적인 동양의 관점이 혼합되어 있다. 필자는 한병철 교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통찰력을 준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피로사회》를 시작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궁금해진다. 과거 시대의 고유 질병은 무엇이고 우리 시대의 고유 질병은 무엇인가? 한병철 교수는 지난 세기를 면역학적 시대라 한다. 그에 따르면, 면역학적 시대의 고유 질병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외부 침입자들이 일으키는 감염성 질병이다. 그 시대에는 이러한 외부 침입자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침입을 막거나 침입자를 제거하는 것이 의학의 목표였다. 시선을 근대 사회로 돌린다면, 근대인들은 외부적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고 심지어 퇴치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세기의 면역학적 시대는 ‘이질성 (Andersheit)과 타자성(Fremdheit)’을 부정하여 제거하려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기 근대인 현재는 신경증적 시대라 규정된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준 등의 신경증적 질환들이 이 시대를 대표한다. 이러한 신경증의 특징은 외부적 타자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로부터 유발된다는 점이다. 그는 타자의 부정과 배제가 아니라 자아의 긍정이 과잉을 이런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제 그의 난해한 견해를 이해해 보자.

먼저 면역학적 시대로서의 근대를 이해해 보자.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는 우리 몸속으로 들어와 우리를 공격한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항원’이라 한다. 항원이 침입하면 우리의 면역체계가 작동한다. 면역 세포들은 항원들을 공격하여 우리 몸을 보호한다. 면역 세포들은 항원을 우리 몸의 정상 세포가 아님을 인식하고 공격한다. 즉 항원은 이질적인 타자인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면역학적 시대인 지난 시대를 한병철 교수는 ‘이질성’과 ‘타자성’으로 규정한다.

그러면 면역학이라는 병리학적 관점이 아닌 일반적인 철학적 관점으로 이해해 보자. 그의 이질성과 타자성을 이해하기 좋은 철학적 기반은 비판 이론 1세대의 비판 철학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과 《부정 변증법》에서 보여 준 자기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 이성의 지배에 대한 비판이 이와 통한다. 이성의 지배 욕구를 보여 주는 것이 개념(concept)이다. 개념적 사고는 우리가 구체적인 대상들을 보다 수월하게 이해하게 해 주는 추상적 도구다. 개념을 통한 유추적 사고를 통해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개념의 추상성과 일반성에 있다. 이러한 추상성과 일반성은 그 개념이 포괄하고 있는 구체적인 대상들의 고유성을 모두 말살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개념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바로 개념적 사유는 인식 대상(object)으로서의 타자가 지닌 고유성을 사상시키는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개념의 폭력성은 정의(定義; definition)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하기’이다. 정의하기에서는 뜻이 명백해짐과 동시에 추상화가 일어난다. 우리 집 ‘장군이’를 보고 ‘개’를 정의하는 순간 ‘장군이’가 지닌 ‘누런색 털’, ‘진돗개’, ‘3살’, ‘주인에게 장난을 잘 치는 녀석’이라는 개별적인 특징들은 모두 사라진다. 개성을 잃은 개가 된다.

정의의 폭력성은 정의의 형식적 구조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된다.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한 정의는 한정을 요구한다. 이 한정을 통해 정의되는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들이 분류되어 집합을 이룬다. 예를 들어, ‘인간’을 ‘합리적이고 언어적이며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러한 인간 규정은 동물 중에서, 즉 동물의 집합에서 다른 종(種)의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간주되는 속성-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정의는 범주화다. 정의된 대상의 범주에 드는 것과 들지 않는 것의 구별이 일어난다. 이때 그 범주에 들지 않는 것들은 타자(他者)이고 이질적인 것들이다. 개념을 드러내는 정의는 범주화를 통해 범주에 드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각 대상의 고유한 특징들을 말살하는 폭력성과 함께 범주화에 들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폭력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정의는 이중의 폭력성을 지닌다.

한병철 교수가 ‘면역학적’이라고 주장한 근대는 사실상 이성 중심적 사고, 즉 이성을 통한 개념적 사유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런 사고가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 곧 병리학적 관점에서 면역 체계가 타자를 부정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할 수 있다.

근대가 자기 동일성을 기반으로 타자를 부정하고 배제한다면, 21세기의 후기 근대는 그러한 이질성과 타자성에 대해 반성한다. 대상이 지닌 구체적 개성, 고유성에 가해졌던 폭력은 비판되고, 각 대상들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달리 말해, 근대가 부정의 시대였다면, 후기 근대는 긍정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인종 차별에 대한 비판, 여성 해방, 노동 해방, 그리고 성소수자에 대한 해방 등 그 동안 ‘정상’의 범주에서 배제했던 존재들을 모두 긍정의 관점에서 포용하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바뀌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긍정은 타자가 아닌 자아를 향해서도 이루어진다. 문제는 자아에 대한 긍정이 과도하게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후기 근대의 개인들은 진보를 이념으로 삼은 근대의 후예답게 자아를 긍정하여 ‘더 나은 자아’를 이루도록 자신을 채찍질한다. 우리가 목도하듯이 자아를 사랑하고 긍정하도록 권하거나 명령하는 ‘자기계발서’가 범람하고 있다. 쏟아져 나오는 자기 계발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희망으로 대중들을 유혹한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성과 사회’의 특징이 바로 성공을 향한 자기 긍정의 신념이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타자의 부정이 관심사가 아니다. 개인들은 오로지 홀로 선 자아로서만 존재한다. 자신만을 긍정하고 더 발전된 자아를 만드는 것에 대한 열망만이 가득하다.

한병철 교수는 자아 긍정의 과잉이 역설적으로 행복이 아닌 불행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자기 긍정을 통해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피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피로로 인해 소진 증후군이나 우울증이 나타난다. 우울은 자신의 목표 달성이 어렵거나 힘겹다고 생각될 때 나타난다. 이런 상태가 만성적으로 나타나면 우울증이 될 수 있다. 성과를 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자책으로, 나아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기 착취가 심화되어 성과 주체는 피로에 지치고 우울해지는 것이다. 이 피로가 ‘탈진적 피로’이고, 자아를 탈진시키는 피로는 21세기 후기 근대의 고유한 질병으로서 자기 착취를 속성으로 하는 신경증적 질환을 야기한다.

성과 주체의 탈진적 피로는 순수하게 ‘성공적 자아’를 향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다른 쪽에서 보면 타자에 대한 무관심이 탈진적 피로를 더욱 강화시킨다. 타자가 사라진 피로이기에 고독한 피로이고, 공동체의 유대감은 저 너머 어딘가로 사라지면서 고독한 주체만이 남는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고독한 탈진적 피로의 지양을 말한다. 그는 ‘치유적 피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한트케로부터 실마리를 찾은 치유적 피로는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이 피로는 ‘오르페우스가 동물들을 불러 모으듯이’ 이웃을 불러들여 함께 어울리며 느끼는 피로로서 ‘우리-피로’라 규정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성과와 성공만을 위한 ‘쓸모 있음’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와 ‘쓸모없음’으로 평화로워짐을 목적으로 하는 피로이다. 그래서 ‘성과 사회’의 ‘피로 사회’가 아니라, 근본적 피로로부터 평화와 유대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피로 사회’여야 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진단과 해법을 내는 한병철 교수의 관점은 참신하다. 그러나 그가 21세기의 후기 근대의 특징으로 제시하는 과잉의 긍정성이 근대의 부정성과 대별되는지 의문스럽다. 또한 치유적 피로가 우리의 삶 전면을 채울 수 있을 만큼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후기 근대에 대한 진단을 먼저 보자. 한병철 교수는 긍정의 과잉을 글자 그대로 ‘긍정’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긍정성의 이면에는 부정성이 놓여 있다. 가까운 시기든 먼 시기든, 미래에 무언가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은 현재 그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재적 관점에서는 자기 부정이다. 현재의 자아를 부정하기 때문에 도달해야 할 이상적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다. 후기 근대의 자아가 ‘자아’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타자’를 부정하는 근대와 구별된다. 부정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면역학적 시대를 ‘부정성’으로 특징짓는다면, 신경증적 후기 근대 역시 ‘부정성’으로 특징지어야 할 것이다. 후기 근대는 면역학적 시대의 연장일 뿐이다.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
출처: https://mmbr.asm.org/content/76/1/16

후기 근대를 면역학적 시대의 연장으로 본다면, 이 시대의 자기 부정은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에 유비될 수 있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때 인체의 면역체계가 작동하여 이들 침입자를 박멸한다. 그러나 면역체계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사이토카인 폭풍이 일어난다. 면역 물질인 사이토카인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면역 세포는 정상 세포도 공격하여 치명적일 경우 사망을 유발한다. 스페인 독감이 일으킨 높은 사망률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바로 이 사이토카인 폭풍이다. 사이토카인 폭풍은 결국 타자의 부정과 배척이 자신을 향하면서 이루어진다. 사이토카인 폭풍은 자기 방어적 기제가 자기 공격적 기제로 전환된 것이다.

근대의 타자 부정은 자아 긍정을 강화시킨다. 이 강화가 과도해지면 자아 부정으로 나타난다. 목표 달성을 위한 열망이 우울로 전환되는 것은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못할까?’라는 자기 부정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자아 부정은 현재의 자아 부정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자아 긍정의 과잉’에서 ‘자아’는 미래 자아일 뿐이다. 이것은 현재 자아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한병철 교수가 밝히지 못한 것인지,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후기 근대의 신경증적 질환은 면역학적 시대의 연장으로서 ‘부정성’을 근본 속성으로 삼고 있다.

21세기 또한 부정성으로 규정된다면, 해법도 달라져야 한다. 긍정의 과잉이 유발하는 탈진적 피로를 치유적 피로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 한병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치유적 피로를 ‘우리-피로’라 한다.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피로인 것이다. 이 피로는 성과를 향한 노동 속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며 발생한 피로가 아니다. 그는 노동에 맞선 놀이를 말하는 한트케를 인용한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함께 하는 놀이를 할 때 생겨나는 피로를 치유적 피로의 예로 제시한다. 놀이를 하면서 주체는 목표나 성과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 이웃들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유대감이 증진되어 자아의 고독도 극복한다.

그러나 놀이로 대변되는 치유적 피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놀이가 일상적 삶의 전면을 채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놀이를 통한 치유적 피로는 일상적 노동에 지친 자본주의 시대의 우리들이 ‘노동 밖에 있을 때 행복하다’는 마르크스의 조언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생존을 위한 일상적 노동이 제거되지 않는 한 ‘탈진적 피로’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에게 탈진적 피로는 필연이다. 오히려 한병철 교수가 제시하는 ‘우리-피로’는 현대인들의 여가 선용에서 진작에 나타났다. 젊은 세대뿐 아니라 기성 세대도 자신의 취미로 다양한 동호회 활동을 한다. 스포츠, 음악, 요리 등 이웃과 함께하는 노인 세대의 자아 찾기가 언론의 조명을 받은 지 오래다. 육체적 활동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을 통한 친목 활동, 인터넷 게시판 활동, 온라인 게임 등의 활동도 ‘우리-피로’의 활동이다.

따라서 치유적 피로의 활동은 여전히 근대의 노동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활동일 뿐이다. 따라서 더욱 근본적인 해법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긍정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자아 긍정의 과잉은 미래의 자아에 대한 긍정일 뿐이다. 현재적 자아에 대한 부정을 전제하는 미래 자아의 긍정은 자아의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반면 현재적 자아를 긍정하는 자아는 그러한 피로를 알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수용하면서 자아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그러므로 현재적 자아의 긍정은 피로가 아니라 기쁨이다.

물론 이 이러한 현재적 자아의 긍정이 완전한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이 해법은 순수하게 자아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아를 옥죄는 사회 제도, 더 나아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착취적 자본주의 구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현재적 자아 긍정은 현실 도피나 부적응이라는 낙인으로 불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인으로서 근대적 문제를 성찰한 김수영의 〈서시〉는 근대의 연장선인 후기 근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서시

– 김수영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整理)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생기를 생기 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이명순
개논비연구소 대표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사 석사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 수료
Boston University Visiting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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